사는 이야기

[2020-05-19] 미국 기업과 인문학

영햄영햄 2020. 8. 15. 14:39

1. 8달 전쯤 우리 팀 임원이 외부에서 프로그래머 한명을 영입했다. 유수의 Hedge Fund들과 Goldman Sachs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40대 초반의 영국인 아저씨였는데, 반년이 조금 지난 기간만에 20명에 달하는 우리 팀에서 가장 중요한 Technician이 되었다.

 

 

2. 회사에 있다 보면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 논쟁이 자주 오가는데, 나는 상대방의 직급과 무관하게 논리에서 별로 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와는 논쟁이 붙으면 한 번도 빠짐없이 번번히 깨지곤 했다. 처음 3번 정도는 내 방식이 더 맞을 것 같아서 제안을 했었으나, 항상 이 사람의 방식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온 후부터는 머리를 숙이고 얌전하게 배우게 되었다.

 

 

3. 이 사람을 겪으며 질문이 한 가지 생겼는데, "우리 팀 임원은 어떻게 자신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이 사람을 영입했을까?" 라는 것이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듦으로써 이 사람이 20년에 걸쳐 쌓아 온 컴퓨터 공학 지식과 경험들을 그대로 흡수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같은 경험을 쌓으려면 20년이 걸리지만, 이 사람을 성공적으로 영입하며 그 모든 것을 하루만에 얻은 셈이다. 결국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팀을 위해 일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리더와 조직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미국에 온 후에, 월스트리트에는 한국 사람에게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내 판단으로 이 이야기는 합리화인 것 같다. 한국 사람에게 유리 천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일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자신의 과제를 잘 해내는 능력"이 아니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투명히 전달하는 능력",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영입하는 능력",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욕구를 전달해내는 능력"을 포함하는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즉 인문학이 깊지 않고는 미국에서는 일을 잘하기 힘든 것이다.

 

 

5. 내가 미국에 와서 만난 여러 인종들 중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가장 심오한 이들은 인도인들이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지만 그 뿌리는 대체로 베다를 비롯한 인도 문화에서 기인할만큼 인도 문명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미국 시총 기준 15대 기업들 중 3곳(Google, Mastercard, Microsoft)의 수장이 미국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인도인들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6. 그 외에도 세간에 잘 알려진 미국 기업 리더들의 배경도 독특하다. Apple의 Tim Cook은 성소수자이고, Amazon의 Jeff Bezos와 Steve Jobs는 이혼과 입양가정에서 자랐다. 성소수자와 입양아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이 강한데, "왜 내 성적 취향은 남들과 다른가?", "왜 나는 양부모 밑에서 자랄까?"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들을 굉장히 어린 나이부터 고민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사유의 폭이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깊어진다. 한 사람의 사유의 깊이는 그 사람이 던지는 질문의 깊이와 정확하게 비례하므로.

 

 

 

7. 이런 측면에서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살펴보면 우려스럽다. 미국의 가장 큰 장점이 열정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소프트파워에 있었다면, 트럼프를 필두로 한 우경화로 인해 이러한 인문적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